
Nobody Knows
난민은 저개발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영화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를 보고 깨달았다. 도시의 한 가운데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전기나 수도도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삶을 통해 결국 '난민'이란 경제적 상황에 의한 정의가 아니라 아무도 모르고(Nobody Knows)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Nobody Cares),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상태라는 것을 감독은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는 대중들을 박편화 시킴으로써 개인들을 단절의 상태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다. 서로 연대하고 교류하기 보다는 각각의 파티션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는 개인의 집합인 대중은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통로인 언론과 미디어로 통제하기가 너무나 쉽다. (최근의 집세에 대한 담론을 보라.)

Nobody Knows
박편화된 개인의 삶은 황지우 시인의 시처럼 아주 얇은 막 속의 삶 같아서 쉬 터져버리고 마는 그런 아슬아슬한 삶이다. 이 얇은 막의 위기에 더이상 정부는 그리고 공동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모든 아픔과 고통은 가족에게 강요된다. IMF 위기에 자살한 가장들의 비극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의자에서 떨어지는 간단한 사고로 막내 유키는 죽고마는데 정작 장남 아키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이영도 작가가 말했듯이 진정 "나는 단수가 아닌" 것인가? 우리는 점점 단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으로 글을 맺으려고 할때 문득 신랄한 한 경제학자의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든다.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보고 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 - 황지우
아침마다 머리맡에는 15층이 있다.
이부자리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이건 삶이 아냐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어,
속으로 울부짖는 나는
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한겨레신문'이 놓여 있다
주가 470선도 무너져
러시아를 순방하고 돌아오는 대통령을 환영할 때처럼
전표들이 빌딩에서 쏟아져내리는 명동 증권가;
이 生에는 밑바닥이 없는 듯하다
내심, 돈 좀 빌릴 수 있을까 하고
소설가 Y에게 찾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걸 느끼고 있었따
날이 흐리고 바람이 약간 불었기 때문에
내 살갗에 와 닿는 비닐막 같은 거;
나는 내 生이 담겨서 들려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거다
그거다
베란다에서 1미터만 걸어가면
아침마다 머리맡에는 15층이 있다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문학과지성사 (59쪽)
Posted by 망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