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시절 친구 이야기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난 당시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몸도 마음도 약하고 많이 흔들리는 사람이다.
함께 재수를 하던 학원의 반친구들은 모두 비장한 각오가 얼굴에 드러났었고
그런 비장한 각오는 재수학원 전체의 공기이기도 했다.
그 공기 속에서 나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신을 납득시키는 일은 어려웠다.
이해는 시킬 수 있지만 설득은 할 수 없는 고집불통.
재수를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은 나 자신이었는데
1년간의 재수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지구력이 내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때문에 재수 초반, 나는 많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날은 학원에 갔다가 담임선생님께(학원이지만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조퇴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일찍 나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화방에 쳐박혀 만화를 봤다. (그때고 지금이고 나는 대책없는 도망에는 일가견이 있다.) 담임 선생님은 매우 인자하신 분이셨는데 나를 믿어주었던 것인지 솔직히 "오늘은 공부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맹랑한 재수생 제자를 그런 마음이 들때마다 조퇴시켜주셨다. 물론 그 눈빛은 '얼른 중심을 잡아라'고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렇게 대책없이 흔들리다가 당시 친하던 옆자리 동료(친구보다 이 편이 더 뉘앙스가 낫다고 생각된다)의 편지를 한 장 받았다. 테이프 한 개과 함께...

테이프는 당시 좋아하는 이성친구에서 선물하는 유행이 있었던 ''핸드메이드 컴필레이션 테이프'였고 그 친구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들은 거기 다 담겨있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샤방샤방한 사랑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그 친구는 남자였고, 편지는 "니가 흔들리면 나도 흔들린다. 나는 나를 믿어주시는 부모님들을 더이상 실망시켜드릴 수 없다. 테이프는 여자친구 생기면 주려고 만든 거지만 너에게 주겠다. 정신차려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당시 편지는 남아있지 않으니 내 기억에 의지해 재구성한 것이지만.

편지는 충격이었다.
나를 제외한 반친구들은 모두 비장함으로 똘똘 뭉쳐있었고, 전우의 시체쯤은 얼마든지 즈려밟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어 보였는데, 실은 나로 인해 그 비장한 전사들도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 미안했다. 다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고, 좋은 시절을 창살 속에서 (정말 등교시간이 지나면 학원 정문을 창살문으로 잠궜다) 보내고 있는 동료들에게 내 약한 모습은 불안감을 전염시킬 수 있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 편지를 받고나서 답장을 썼다.
"고맙다. 친구. 너의 일격이 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우리 서로 칼을 겨누고 이 재수기간을 건너가보자. 내가 흔들릴 때 네 칼이 나를 노렸듯이 네가 흔들리면 내 칼도 너를 겨눌테다."
그렇게 우리는 극한의 추위에서 서로 뺨을 때려가며 생존을 기약했다. 물론 그 반듯한 친구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 같으니 나는 주로 맞고 정신을 차리는 쪽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한단계 성장했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모두 내 적인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내 평생 친구로 삼아야할 사람들도 있다.

대학에 진학한 후 그 친구와 연락은 끊겼다. 나중에 혹시 만나게 되면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어서 기억났을 때 적어둔다.

Posted by 망고

11 29, 2008 23:31 11 29, 200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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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자친구+메이드-으로 이어질 블로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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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친구+메이드-에 관한블로그를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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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A]Penguin 2008年 11月 30日 00時 17分 # M/D Reply Permalink

    흠 무언가 저를 확 깨우는 글이네요.
    새벽에 느긋한 마음으로 왔다가 반성하고 갑니다 ㅠㅠㅠㅠㅠ
    옆자리 친구한테도 이 글 보여줬어요. 같이 반성하자고 ㅋㅋ

    1. 망고 2008年 12月 01日 02時 09分 # M/D Permalink

      자자 이제 둘이서 새벽에 서로 두들겨 깨우는거 ^^

  2. 함차 2008年 11月 30日 23時 29分 # M/D Reply Permalink

    그러게요. 한번씩 주위를 의식하지만 어려운시기 동질감을 갖는 동료들에게 서로간의 위안이 되려고..친구분의 예지가 빛나보이네요
    지금 직장에서도 좋은 분들을 많이 알게되었지만..예전에 고맙웠던 분들에게 소원해진 절 반성하게 되네요.
    12월 인사를 드리러 왔다가 요즘 블로그에만 정신없었다는 생각이..
    직접 전화한통..문자한통 보내는 따뜻한 12월을 보내야겠어요
    행복한 12월 되세요

    1. 망고 2008年 12月 01日 02時 11分 # M/D Permalink

      네 감사합니다. 저도 예전 직장 동료들 좀 찾아가봐야겠어요. 밥 얻어먹으러 ^^;;; 함차님도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

  3. terminee 2008年 12月 01日 19時 22分 # M/D Reply Permalink

    재수시절 특이한 경험이시구만요.
    칼을 겨누고 함께 앞으로 가는 동료라... ^^

    '핸드메이드 컴필레이션 테이프'의 추억... 크크.
    난 주위에서 보기만 봤지 만들어 준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데,
    남자한테라도 받아 보는 게 나은 건지, 안 받고 마는 게 나은 건지... 크크

    1. 망고 2008年 12月 01日 23時 46分 # M/D Permalink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할 뿐이라고 누가 그랬다더라.ㅋ

  4. sha 2008年 12月 02日 00時 20分 # M/D Reply Permalink

    재수생이면 19? 20? 그 나이에 저런 멘트들이 나올 수 있게 만든 사회란.
    하, 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왠지 모를 애틋함, 아련함은 또 뭔가.

    1. 망고 2008年 12月 02日 15時 03分 # M/D Permalink

      소년만화에 주로 나오는 대사들이지

  5. sunny 2008年 12月 03日 01時 19分 # M/D Reply Permalink

    같이 밥 얻어먹으러 가장~ ㅋㅋ

    난 정신차리게 해줄 친구도 없이 혼자 외롭게 공부했는데
    회사 나오고 흔들릴 시간도 없이 시험이 코앞이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

    1. 망고 2008年 12月 03日 12時 04分 # M/D Permalink

      아직 분당에 있지? 분당... 느무 멀어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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