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작가다

13계단13계단 - 8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황금가지

1. 추리소설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다. 이야기 전개 이외에 추리라는 요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머리를 굴리며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사건이 있고, 증거들이 속속 드러난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책을 덮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범인은 누굴까. 동기는 뭘까.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생각을 하다보면 몇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해볼 수 있는데, 이 중 어느 하나가 들어맞을 때 그 희열감이란! 작가의 뇌를 들여다본 기분이다.

2. 추리소설 작가의 딜레마
추리소설에는 몇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로 논리적이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사건 전개를 대충 얼버무리다가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 의해 완전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자칫하면 추리소설이라고 쓴 글이 연애소설이나 심지어 무협지로 분류되어 책장에 꽂히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말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독자를 놀라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독자의 뒤통수와 무릎을 상하게 하는 정도의 지적 반전. 추리소설 작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일 것이다. 이쯤 해서 자신의 책이 출판되고 나서 정형외과에서 환자들을 관찰하는 작가를 상상해보자.

논리와 반전은 양날의 칼이다. 무턱대고 반전을 노리다가는 논리의 칼날에 자신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또 지나치게 우직스런 논리전개로 손에 있는 패를 모두 보여주며 플레이를 하다가는 중반쯤에서 이미 사건의 핵심이고 범인이고 다 들통나버리고 말 것이다.

이 두 가지 딜레마에서 훌륭한 작가는 훌륭한 검사를 답습한다. 즉, 사건의 핵심이 될만한 증거를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증거들 사이에 슥- 끼워넣는다. 때론 등장인물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때론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 사이에 슬쩍. 그리고는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이 증거를 독자가 놓쳤기를 바라는 마음에 소설의 전개는 갑작스레 빨라진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Bang. 독자들은 뒤통수 혹은 무릎을 문지르며 소설의 앞부분을 들추어보고 있을 것이다.

3. 훌륭한 추리소설 작가로부터 뒤통수와 무릎을 보호하는 방법
자신의 뒤통수와 무릎을 보호하려면 작가가 흘린 정보를 잡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숙련된 추리소설 독자는 아주 세세한 정보에까지 집중한다. 좀 더한 독자는 세세한 부분에만 집중한다. 어차피 작가가 대문짝만 하게 내놓은 증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평범한 작가의 평범한 추리소설로부터는 이러한 방법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표지를 잘 읽고 날개 또한 잘 읽고 어떤 방법으로 읽을지 미리 정하라.

4. 뒤통수는 무사하다. 하지만, 무릎에 멍이...
이 책 13계단을 처음엔 마음의 준비 없이 평범한 추리소설을 읽는 법에 따라 읽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이러다 뒤에 가서 한 대 맞을 것 같은 예리한 직감이 들어 훌륭한 추리소설 읽는 법으로 전환했다. 결과는? 뒤통수는 무사할 수 있었지만 무릎엔 살짝 멍이 들었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첫 작품으로서는 무시 못할 내공이다. 하지만, 긴박한 전개의 과정에서 작가의 흔들림이 살짝 엿보였고 그 덕분에 뒤통수는 무사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 사이로 작가의 음흉한 웃음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일부러 빈틈을 보인 건가? 아뿔싸, 작가의 1차 목표는 독자의 뒤통수도 무릎도 아닌 책을 읽도록 하는 것 자체였던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http://www.shimminkyu.com/tc2007-09-19T02:53:500.3810

Posted by 망고

09 19, 2007 11:53 09 19, 200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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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3계단 :: 13階段

    Tracked from 서비의 다락방 12 6, 2007 00:10 Delete

    근래 읽은 스릴러 중 가장 강한 인상과 만족감을 얻은 작품. 사형수의 사형집행 순간을 묘사해놓은 장면에서는 사형수와 형을 집행 해야만 하는 사형집행인 사이의 감정의 엇갈림과 고뇌가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히 전해져 올 정도.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나 사건전개도 꼼꼼히 묘사하고 있어 자연스레 상황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여 있어 읽기에는 편안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활자처럼 편안하지 않은 수작. 이 소설도 아니나 다를까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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